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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자 시인 회사원 사진 이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시집 <나가사키, 나가사키의 만다라여>를 들고 부산일보를 찾았다. 정종회 기자 jjh@


광복 80년을 맞아 부산의 김광자(83) 시인은 요즘 어느 때보다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 시인의 시집 <나가사키, 나가사키의 만다라여>가 지난달 일본에서 나오면서 찾는 사람이 부 카드복합할부 쩍 많아져서다. 이 시집은 일본의 국립 나가사키 대학이 번역 출간을 지원했다. 지난달 25일에는 피폭 80주년을 맞아 나가사키 대학에서 시집과 같은 제목의 기획 강연을 열고, 일본 여러 언론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 시인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일본 언론의 안내로 원폭을 맞아 폐허가 되었던 생가가 있던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잠깐 부산으로 돌아왔던 직장인 사업자 김 시인은 8~11일에 열린 피폭 80주년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 평화기념식전에 참석하고, 스즈키 시로 나가사키 시장을 예방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김 시인은 1990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시집 13권과 선집 2권을 출간했다. 34년간 교직에 몸담았고, 부산시인협회 이사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김 시인이 지난 별내역 해 연말 <잊을 수 없는 그날의 記憶(기억)들>을 발간하기 전까지는 원폭 피해자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 회원 열아홉 명의 증언을 수록한 이 책의 편집 역시 그가 맡았다. 김 시인을 만나기 전에 이 책에 수록된 그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 봤다. 다음은 이 글을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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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자료관에서 일본 언론들이 김광자 시인을 인터뷰하고 있다. 김광자 제공


1945년 8월 9일. 천둥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의 섬광이 번쩍했다. 유리가 깨어져 박살이 나면서 날카로운 조각이 세 식구 몸을 찌르고 박혔다. 동시에 이층 목조 건물 우리 집이 폭삭 내려앉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부서지는 건물에 깔려 기절하고 말았다. 두 분이 깨어나서 보니, 나는 아랫도리에 불이 붙은 상태로 변소에 처박혀 있었다.
아버지가 불을 끈 뒤 나를 업고 집 앞 방공호로 대피했다. 난 시각장애인이 된 줄 알았는데 한참 지나 눈을 뜨니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방공호 안은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물을 주면 피폭 화기로 금방 죽기 때문에 살인 행위로 여겨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목이 말라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어 가는 피폭자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가족은 11일 방공호를 나와 나가사키를 떠나기로 했다.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원폭으로 사망한 시체 더미를 넘고 넘었다. 여름철이라 불에 탄 시체에는 까만 파리 떼와 하얀 구더기가 꿈틀댔다. 나는 구더기 떼를 보고 그게 흰 쌀 밥알인 줄 알았다. “배가 고프다. 저것 맘마 달라”라고 보챘다. 태어나서 그렇게 지독한 냄새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집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장소에서 2㎞ 거리에 있었다. 나중에 이웃 소식을 알아보니 우리 세 식구만 살아남았다. 8월 15일. 라디오에서 천황의 항복 육성이 흘러나왔고, 광복을 맞이했다.
한국으로 귀환하기로 했다. 시모노세키에서 밀항 목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기관 고장으로 배 시동이 꺼져 다시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힘들게 고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공중목욕탕에 가면 상처 때문에 나병 환자 취급을 당했다. 아버지는 31년간 피폭의 통증과 통한에 시달리다 58세, 어머니는 54년간 고생하다 77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피폭당했다는 걸 말하지 말아라. 시집 못 간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피폭으로 인해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김광자 시인이 일본 나가사키시 스즈키 시로 시장(가운데)을 예방했다. 김광자 제공


<부산일보>를 찾아온 김 시인에게 먼저 그날의 상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는 오른쪽 다리와 왼쪽 옆구리에 새겨진 흔적을 보여주려고 했다. 기자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상처를 비유로 설명했다. “토마토를 데치면 껍질이 살짝 벗겨진다. 그것처럼 피폭으로 살이 흐물흐물해지더니 벗겨지고, 우그러졌다. 거기서 혈관이 터지고 체액이 나오면서 고름과 같이 흘러내렸다. 그랬던 상처가 지금은 가죽처럼 단단해졌다.” 역시 시인이었다. 80년 가까운 오랜 세월 피폭 사실을 숨기고 살아온 노 시인과 마주 앉아 고백을 들었다. 그 이야기는 시 같기도 하고, 대하소설 같기도 했다.



김광자 시인과 어머니 이금옥 씨. 김광자 제공


-언제 어디서 태어났나.
“1943년 1월 3일 일본 나가사키 대포정 16번지에서 태어났다. 폭심지에서 약 2km 떨어진 지점이다. 이번에 가보니 새로 지어진 집이 추녀(서까래)는 옛날 그대로인 채 빈집으로 남아 있더라.”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배 기관장이었던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발목이 절단되어 의족을 하고 다녔다. 아버지는 피폭 이후 방사선 화기증으로 고생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원폭 때 참상을 나한테만 이야기했다. 눈을 굉장히 좋아했다. 눈 오는 날이면 입을 벌리고 눈을 먹었다. 화기를 달래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이라는 시에 담았다. 어머니는 피폭 당시 엉덩이에 유리가 박혔고, 그것을 뽑아낸 자국이 함몰되어 흉터가 3곳이나 있었다. 또 왼쪽 다리가 골절로 어긋나며 짧아져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했다. 어릴 적 친구들은 어머니의 걸음을 흉내 내며 놀렸다. 그때는 친구들과 많이 싸웠지만, 시를 쓰면서 그 친구들이 한없이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는 나가사키 피폭 자료관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영상으로 입력되어 지금도 피폭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원폭 피해자라는 사실을 그동안 왜 숨기고 살았나.
“일본에서도 시인이라면서 그동안 원폭 관련한 시를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다. 부모님은 나가사키 출생은 말해도 피폭자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침묵하라고 했다. 그래서 죄지은 사람처럼 감추고 살았다. 유년 시절 공중목욕탕에 가면 피고름이 섞인 누런 체액이 흐르는 물렁물렁한 살점을 보고 사람들이 문둥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전염된다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서러웠지만 그때는 해명도 못 했다. 아버지가 그 사람들을 야단치면 피폭자라고 더 소문이 날 것 같아 집에 와서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런 감정의 앙금이 남아 시인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먼저 간 남편에게도 평생을 숨겼다. 남편이 원자폭탄 이야기를 할 때면 뜨끔뜨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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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발간된 <나가사키, 나가사키의 만다라여>.


-시집 <나가사키, 나가사키의 만다라여>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
“그동안 한국에서 원폭 관련해 증언은 있었지만, 문학 작품은 한 편도 안 나왔다. 지난해 겨울에 출간된 시집 <시축일기>에 같은 제목의 시가 들어 있다. 원폭이 떨어진 그날 이후의 체험과 증언을 서사시로 묶었다. 나가사키 참상에 대한 시가 더 있으면 좋겠다는 나가사키 대학의 요청에 따라서 몇 편을 추가하고 이전 작품도 함께 실었다. 개인의 생존과 행복, 삶의 권리를 빼앗은 원폭이라는 야만적 행위에 통분(痛憤)한다. 병사도 아닌 민간인이 왜 화학무기에 대량 학살되어야 하는가. 원폭에 희생된 영혼들의 위상을 더 높이는 이름이 없을까 고민하다 이들을 ‘만다라’로 부르기로 했다. 만다라는 불심으로 피는 절대적인 영적 존재를 상징한다. 피폭자인 나 또한 만다라 예정자이다. 살상으로 숨진 무고한 영혼들을 시로 대변했다.”
-나가사키 대학 강연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했나.
“세 살 때 피폭된 여식이 83세의 노파가 되어 본태 본향으로 돌아와 만감이 교차했다. 되돌아보니 80년 세월 나의 발자취가 가까운 이웃 사람의 회상 같았다. 피폭인들을 위로하고 추도하는 마음을 전했다. 국적을 초월해 시민들의 죽음을, 민간인들의 참혹한 실상을 후세인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원폭이 떨어진 날이 다가오면 핵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강조하지 않는가. 원폭 80주년을 맞아 나가사키가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핵 반대 슬로건으로 평화를 선도한다면 세계가 주목할 것이라고 했다. 피폭의 도시 나가사키가 평화의 도시 메카가 되길 꿈꾼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이 있다면 이야기해 달라.
“손가락에도 관절염이 있어서 한 시간 동안 글을 쓰면 드러누워야 한다. 하지만 나는 원자폭탄을 맞고도 살아난 악바리 여자가 아닌가. 일본과 나가사키에 대한 시와 글을 더 쓰고 싶다. 원폭에 관한 시집도 별도로 내고, 자서전도 쓰고 싶다. 내년 1월 3일 생일날, 내가 태어난 그 집에 다시 가서 하룻밤 자면서 구상할 생각이다. 사람들이 원폭 역사를 지닌 나가사키를 기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화를 갈구하는 계기로 삼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김광자 시인이 원폭 평화공원 맞은편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김광자 제공